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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추석설교]죽음 앞에 선 인생

yunhy11 2007. 9. 17. 23:37
[추석설교]죽음 앞에 선 인생


죽음 앞에 선 인생

열왕기상 2장 1~4절

“다윗이 죽을 날이 임박하매 그 아들 솔로몬에게 명하여 가로되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고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을 지켜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된 대로 지키라 그리하면 네가 무릇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지라…(이하 생략)”



단 한 번뿐인 인생

어떤 사람이 병중에 신음하고 있었습니다. 그 때 노크도 없이 문이 슬며시 열리면서 어떤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섰습니다. “당신 누구요?” 환자는 놀라서 물었습니다. “나는 죽음이다. 너를 데리러 왔다. 일어나 나와 같이 가자.” 죽음은 검은 손을 내밀었습니다. “아닙니다. 조금만 참아 주십시오.” 환자는 다급하게 소리쳤습니다. “왜? 내가 무서우냐? 소원이라면 더 기다리지... 그리고 이 다음에 올 때에는 네가 놀라지 않도록 먼저 사신을 보내마...” 말이 끝나자마자 죽음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졌습니다.

환자는 다시 건강해졌습니다. 그리고 슬픈 일을 당하고 사업 실패도 맛보고 고통도 많이 맛보고 또 다시 앓아 눕기도 하며 사는 동안 그는 꼬부랑 노인이 되었습니다. 침상에 누워 있던 어느 날, 언젠가 만난 검은 사람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당신은 죽음이란 분이 아니십니까?” “오냐, 그렇다.” “왜 기별 없이 오셨습니까? 먼저 사신을 보내고 그 다음에 온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이 사람아, 그게 무슨 소린가? 내가 그 동안 여러 번 사신을 보내지 않았는가? 슬픔도 보내고 고통도 보내고, 나중에는 노쇠까지 보내지 않았는가? 그게 다 사신일세.” 그 사람은 무엇이라고 할 말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죽음을 따라가고야 말았습니다.

히브리 기자는 죽음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히 9:27). 히브리 기자의 이 말은 대체로 세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첫째, 죽음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는 말씀입니다. 둘째, 인생의 삶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셋째, 그러므로 영원한 내세를 준비하는 데 있어서 이 세상의 삶은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죽음, 축복 중의 축복

원래 죽음은 죄 값이었습니다(롬 6:23). 이렇듯 저주와 형벌의 대상이었던 죽음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도리어 축복과 영생의 관문이 된 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죽음을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롬 8:2). 그러므로 전도서 기자는 아름다운 이름이 보배로운 기름보다 낫고,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낫다고 한 것입니다(전 7:1). 과거 우리가 율법 하에 있을 때 죽음은 확실히 우리에게 저주였습니다. 형벌이었습니다. 두려움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므로 해서 얻어진 해방으로 인해서(롬 8:2) 죽음은 영광의 세계, 천국으로 가는 관문이 된 것입니다.

앗시시의 성자 프란체스코는 죽음을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나의 자매 죽음을 인하여 / 주를 찬양할찌라. / 죽음에서 피할 수 없음은 / 축복 중의 축복이니 / 두 번째 죽음이 우리를 해치 못하리라 /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맡기는 자여 / 그대에게 축복이 있으리라.” 프란체스코의 이 시에서 우리는 참된 그리스도인은 죽음을 초월한 자이어야 함을 알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에게는 죽음이 저주와 형벌이지만 하나님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죽음은 저주도 형벌도 아닌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음의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심으로써 죽음을 정복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역시 프란체스코처럼, 죽음을 일컬어 나의 자매요, 축복 중의 축복이라 일컬을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성경은 이런 사람을 일컬어 참된 그리스도인이라 부릅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죽음에 대하여 무기력하던 과거와는 달리, 죽음이 우리에게 무력하게 된 신분을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일컬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선언합니다(요일 3:14). 이제 우리는 사도 바울처럼 우리를 괴롭히던 사망을 향하여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5-56)고 선언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산다는 것은 죽는 것과 같다. 잘 산다는 것은 잘 죽는다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잘 죽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한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의 말은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죽음을 도리어 영원한 천국의 관문으로 삼고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세상 삶이 죽음 이후에 찾아 올 내세 천국 생활을 위해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워 줍니다. “사람이 왜 죽는가 하는 물음은 곧 사람이 왜 사는가 하는 물음과 직결된다”고 한 시인 박두진 선생의 말 역시 이와 궤를 같이 하는 말입니다.

다윗의 유언을 통한 교훈

그리스도인은 잘 죽기 위해 잘 살아야 합니다.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 성군 다윗이 죽음에 임박하여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입니다.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국가를 통치하는 통치술이나 국가 간의 외교관계의 비법을 전수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은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자는 어떻게 이 세상을 살아야 할 것인가, 어떻게 죽음을 준비할 것인가, 바로 죽기 위해서 바로 사는 법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폴란드 격언에 “죽은 자의 유언은 그의 일생의 거울이라”고 한 말이 있습니다. 다윗이 남긴 마지막 유언 역시 그의 지나온 일생을 담고 있기에 값진 것입니다. 그러면 다윗이 그 아들 솔로몬에게 남긴 유언은 무엇입니까? 이를 통하여 죽음을 바로 준비하는 삶의 지혜를 배우고자 합니다.

1. 죽음을 인식하라

먼저 다윗은 죽음의 일반성에 대해서 유언하고 있습니다. 본문 2절을 봅시다. “내가 이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로 가게 되었노니...” 여기서 다윗이 말한 “세상 모든 사람의 가는 길”이란 바로 ‘죽음’을 의미합니다. 이 말씀은 성군 다윗이 사람은 누구나 죽는다는 죽음의 일반성과 보편성을 알고 있었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바로 다윗의 지혜입니다. 히브리서 9장 27절에서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라고 한 히브리기자의 말씀처럼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일반적인 재난입니다. 이는 우리 인간들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법칙입니다.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죽음을 인식하고 사는 사람과 죽음을 인식하지 못하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언젠가 사람은 한 번 죽는다고 인식하고 사는 사람은 죽음을 준비합니다. 그러나 오는 죽음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쾌락에 빠져서 자신이 누리는 세상 즐거움이 영원토록 계속될 것처럼 생각하여 허랑 방탕하게 삽니다. 죽음에 대한 인식은 그래서 중요합니다.

죽음은 인간이 이 세상에서 제일 마지막으로 통과해야하는 관문입니다. 죽음은 선택사양이 아니라 필수사양입니다. 그 이유는 죽음은 인생의 필수 코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고로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준비도 없이, 예고도 없이 가야 합니다. 이 세상에 죽음에서 제외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그러므로 잘 죽기 위하여 잘 사는 법을 배우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새 생명을 얻게 된 우리들은 한정된 이 세상을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듯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처럼 막 살아서는 안되겠습니다. 히브리 기자가 말한 것처럼 이 세상보다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는 나그네의 심정으로 이 세상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히 11:16). 이는 마치 사도 바울이 골로새 교회 성도들에게 “위엣 것을 생각하고 땅엣 것을 생각하지 말라”(골 3:2)고 말한 것처럼 위엣 것을 찾는 생활입니다(골 3:1-2).

그리스도인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을 완전히 도외시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배가 물 위에 있으나 물이 배 안에 들어오지 못하듯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살면서도 이 세상 죄악이 그리스도인의 삶을 잠식치 못하도록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이 세상 쾌락과 즐거움에 마음이 빼앗겨서는 안됩니다.

2. 용기를 가지라

그러면 이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다윗은 본문 2절 말씀에서 아들 솔로몬에게 이 세상사는 법을 이렇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 다윗의 많은 아들 가운데 솔로몬은 압살롬이나 아도니야처럼 건장하고 강한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솔로몬이 잠언 4장 13절에서 자기 스스로 고백한 것처럼 유약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양친으로부터 항상 염려와 근심의 대상이 되었던 약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러하였기에 다윗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저 어린것이 어떻게 이 나라를 이끌어 갈꼬?”

그리하여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너는 힘써 대장부가 되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아들 솔로몬을 향한 다윗의 이 당부의 말은 “너는 남자처럼 강하게 살라”는 의미가 들어 있는 말입니다. 이렇듯 다윗은 자신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려 나갈 막중한 사명을 짊어진 아들 솔로몬에게 있어서 가장 우선 되는 통치자의 자질이 대장부가 되는 것에 있다고 본 것입니다.

옳습니다. 이처럼 그리스도인은 대장부처럼 강해야 합니다. 이 세상 죄악과 유혹에 쉽게 무너지는 유약한 존재가 되어서는 결코 아니 될 것입니다. 죄를 이기고 세상을 이기고 사탄을 이기려면 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해야 합니다. 그래서 죽음을 목전에 둔 모세 역시 이와 같은 심정으로 이스라엘 백성들과 여호수아에게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고 유언한 것입니다(신 31:6-7). 유약한 심경으로는 죄와 유혹을 이길 수 없습니다. 사탄의 공격을 물리칠 수 없습니다. 결국 이세벨의 군사에게 쫓기다 광야의 로뎀나무 아래 쓰러져 죽기를 구하던 엘리야처럼 절망하고 쓰러질 수밖에 없습니다(왕상 19:3-4).

연약한 상태로 세상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세상 부모의 심정처럼 우리가 강한 대장부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깨어 믿음에 굳게 서서 남자답게 강건하여라”(고전 16:13)고 한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끊임없이 찾아오는 죽음과 실패, 불행과 낙담에 쓰러지지 않고 일어서는 유일한 길이 바로 삶에 대한 용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대장부가 되는 길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나보다 강하신 하나님을 굳게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기 때문이며(고전 1:25) 바로 그 하나님은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는 분이기 때문입니다(고전 1:27).

3. 하나님의 말씀으로 강해지라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방법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십니까?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으로 우리를 강하게 하십니다. 말씀은 때로 찌르는 채찍처럼(전 12:11) 강합니다. 본문 2절 말씀에서 다윗은 아들 솔로몬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며 그 길로 행하여 그 법률과 그 계명과 율례와 증거를 모세의 율법에 기록 된 대로 지키라”

말씀의 강한 능력을 체험하며 산 사람만이 이런 말을 할 수가 있습니다. 다윗은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하고 실천함으로써 강하신 하나님에게 붙들려 위대한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되어 강대한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다윗이 이스라엘 나라를 반석 위에 올려놓은 것은 자신의 지혜나 능력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다윗의 마음 속, 생활 속에 있었던 하나님 말씀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다윗은 자신을 이토록 강하게 하고 힘있게 한 이 하나님의 말씀을 아들 솔로몬이 지켜 대장부처럼 살기를 바랬던 것입니다.

본문 3절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며 사는 생활에는 무엇을 하든지 어디로 가든지 형통할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베들레헴 촌 목동에 지나지 않았던 다윗을 일국의 왕 되게 한 것은 바로 하나님의 말씀의 힘이었습니다. 다윗은 어려서부터 말씀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온전히 지키며 살았습니다. 말씀을 읽는 것, 말씀을 묵상하고, 지켜 말씀대로 사는 것은 능력의 하나님으로 하여금 나를 향해 일하시게 하는 유일한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구에게나 유익이 됩니다. 정치가가 지키면 통치력을 키울 수 있고, 사업가가 지키면 사업이 윤택해지고, 학자가 지키면 학식이 더하여 집니다. 이는 말씀은 하나님 자신이며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기 때문입니다(요 1:1, 14).

죽음은 누구에게나 찾아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잘 죽기 위하여 잘 살아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솔로몬에게 주신 다윗의 교훈처럼 살아야합니다. 이것이 잘 죽는 길이며 죽음 이후에 하나님 앞에서 칭찬 받고 상급 받는 길입니다.


왕성교회 길자연 목사
출처 : 인터넷로고스선교회
글쓴이 : lemalogo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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